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종(조선)/특이한 기록들 (문단 편집) == 사직할 수 없는 직장 == || [[파일:attachment/황희/retirement.jpg|width=100%]] || || 황희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는 세종을 그린 [[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family/217/read?articleId=23674656&bbsId=G005&itemId=64&pageIndex=1|만화.]][* 원본은 [[가슴 만지게 해주세요]]이다.] || > * [[1431년]] [[9월 10일]] 황희가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이 당시 이미 만 '''68세'''였다.] > * [[1432년]](세종 14) [[4월 20일]] 황희가 고령을 이유로 사직하자 '''허락하지 않다'''. > * 같은 해 [[12월 7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하니, '''윤허하지 아니하다'''. > * [[1435년]] [[3월 29일]] 영의정부사 황희가 전을 올려 노쇠함으로 사직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치 않다'''. > * [[1436년]](세종 18) [[6월 2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하니 '''윤허하지 아니하다'''. > * [[1438년]](세종 20) [[11월 19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을 청하니 '''허락치 않다'''. > * [[1439년]](세종 21) [[6월 11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할 것을 청하다. 같은 달 12일 황희의 사직을 '''반대하다'''. > * [[1440년]](세종 22) [[12월 21일]] 영의정부사 황희가 자신의 파면을 아뢰다. > * [[1443년]](세종 25) [[12월 4일]] 영의정 황희가 연로함을 이유로 해면을 청하나 '''듣지 않다'''. > * [[1449년]] [[10월 5일]] 황희를 영의정부사로 그대로 '''치사(致仕, 벼슬을 두고 물러남)'''하게 하다. > * [[1452년]](문종 2) [[2월 8일]] 영의정부사 황희의 '''졸기(卒記/사망)'''. 실록에 나온대로 세종을 신하들의 사직도 윤허하지 아니하며 끝까지 부려먹은 왕으로 인식한다면 조선왕조실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 생긴 오해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들은 인물들이 밟은 행적의 원인과 정치적 의도를 모두 고려하여 해석해야 하는데 액면 그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면 이렇게 오해가 발생한다. 조선의 역사를 연구한 교수들은 세종이 신하들의 사직을 반려한 이유를 신하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판단한다. 황희처럼 오래 재직한 재상들은 다른 신하들에게 언제 그 자리에서 물러나냐는 의문과 질투를 받기 마련인데 이를 막고자 신하는 사직을 원하지만 왕인 내가 윤허하지 않는다는 명분을 제공한 것이다. 또한 3년상을 정석대로 치르느라 관직에서 물러나는 경우 경쟁이 심한 조정에서 거물이 아니고서야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그래서 신하들의 앞날이 막히지 않도록 상중에도 한양에 남겨두는 정치적인 배려를 한 것이다. 시국에 따라 3년상을 줄이거나 상복을 벗고 직무를 수행하도록 지시하는 기복은 세종이 갑작스럽게 만든 제도가 아니다. 그래서 신하가 죽기 전까지 부려먹는 악덕 왕이라는 유머도 존재한다. 출중한 능력을 발휘할 의지를 가진 신하를 신뢰하여 고용하면 마지막까지 고용한 세종 특유의 인사 스타일로 나온 이야기이므로 사직도 윤허하지 않으면서 부려먹은 왕으로 보는 건 오류이다. 조선 왕조에서 사직의 횟수와 사유를 그대로 해석하면 오류가 일어난다. 사직서만 모아도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224B_0060_010|한 권]]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3&cate1=Z&cate2=&dataGubun=%EA%B6%8C%EC%B0%A8&dataId=ITKC_BT_0224B_0240|이상]]의 분량이 나오는 [[류성룡]]은 누가 보더라도 사직의 이유가 [[이순신]]인데도 불구하고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002028_001|사직서]]에서는 건강을 이유로 든다. 징비록에 따르면 이순신이 파직된 1597년 2월부터 정탁과 이원익의 구명으로 겨우 목숨을 건지고 백의종군으로 풀려나는 4월까지 류성룡은 칭병하고 자택에 칩거해서 10번의 사직서를 올린다. 실록에는 사직서의 일부만 기록된 것. 선조는 류성룡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다가 이순신을 풀어주고 나서도 사직서를 올리는 류성룡에게 병든 몸으로라도 당장 조정에 나오라고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004013_001|어명]]을 내린다. 그렇게 류성룡은 강제로 조정에 복귀하게 된다. 휴식을 모르고 일하기 바쁜 세종의 신하들이 격무에 시달린 것은 당연하다. 황희, 조말생, 김종서 등 세종 치세의 신하들은 사직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여 노년기에도 관직에 머물렀고 건강을 이유로 사직을 요청해도 모두 반려당한다. 황희도 노환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을 요청하나 세종은 윤허하지 않는 것으로 응수한다. 이징옥을 비롯한 다른 신하들도 수많은 사유를 말하며 사직을 요청하나 역시 윤허하지 [[http://pgr21.com/?b=10&n=110384|않는다.]] 그래서 황희는 세종 치세에 80대의 나이에도 정승으로 일하였다. 포기하지 않고 사직을 요청한 황희는 결국 사직에 성공하지만 그때는 세종이 [[https://www.korean.go.kr/front/onlineQna/onlineQnaView.do?mn_id=216&qna_seq=70772|승하]]하기 4개월 전이다. 사실 황희는 유능하지만 비리를 지속적으로 저지르는 바람에 여러 번 탄핵을 당한다. 세종도 황희가 저지른 비리를 알지만 황희의 능력이 출중하고 왕권에 위협을 가하는 비리를 저지른 것도 아니어서 황희가 사직을 요청해도 반대하는 입장만 피력해서 황희는 권력욕이 없어서 물러나려 하지만 내가 관직을 유지시키는 것이니 더는 거론하지 마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이러한 세종의 모습은 아버지인 태종과 유사한데 태종도 뇌물을 많이 받은 하륜을 탄핵해야 한다는 상소를 받고서도 하륜이 왕권을 위협하지 않는 신하라는 이유로 처벌하지 않고 넘어간다. 물론 세종의 치세에는 신하들이 세종의 뜻을 따라서 막중한 업무를 하였으므로 현대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사직하려는 걸 세종이 알고 막은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게다가 후대를 위해서 과거로 뽑은 젊은 신하들을 세종이 집현전에서 무자비하게 굴리는 바람에 고령의 중신들이 고생이 심하였다. 일이 너무 힘들지만 3년상을 치른다고 사직서를 내도 세종이 핑계로 여기고 윤허하지 않을 상황이니 장영실이 업무에서 벗어나려고 고의로 가마를 부실하게 만들었다는 말도 나온다. 조선에서 3년상을 치르다가 사망하는 사람도 많았을 정도로 3년상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조선의 신하들은 3년상을 치르려고 벼슬에서 물러나기도 하고 이순신도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서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3년상을 마치고 복직하였다. 그렇게 신하들을 굴리면서도 신하들이 지치지 않고 일하도록 배려하는 모습을 보인 왕이 세종인데 황희가 노환으로 힘들다고 사직을 청하니 가마를 지원하였다. 신하들이 질병으로 사직하거나 제수를 거절하는 건 보통 핑계인데 황희에게 가마를 내리고 집에서 근무하라고 지시한 기록을 보면 황희의 경우 정말 순수하게 병을 앓은 것이 이유로 보인다. 그렇다면 세종은 조정으로 출근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아픈 황희에게 일을 시킨 왕이 된다. 신하들도 세종이 세자에게 업무를 넘기는 것을 막으면서 받은만큼 [[http://pgr21.com/?b=10&n=111360|보답하였다.]] 물론 태종처럼 조선에서 임금이 대리청정이나 양위를 한다고 선언하며 왕권을 확인하는 경우도 많았기에 [[순조]]가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기 전에는 대리나 양위를 하겠다고 하면 신하들이 단체로 "아니되옵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말하면서 거둬달라고 고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이렇게 아픈 시기에 세종이 창제한 것이 [[훈민정음]]. 조선 시대를 통틀어 세종만큼 개성이 강하고 튀는 신하들이 많은 왕도 드물다. [[황희(조선)|황희]], [[맹사성]], [[허조]], [[조말생]], [[최윤덕]], [[정인지]], [[최만리]], [[김종서(조선)|김종서]], [[황보인]], [[정분]], [[이예]], [[이징옥]], [[박연]], [[장영실]], [[이천(조선)|이천]], [[성삼문]], [[신숙주]], [[최항(조선)|최항]] 등이 세종 치세의 신하들인데 이렇게 성향이 분명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신하들을 데리고 국정을 운영하여 조선을 발전시킨 세종은 인재를 발탁하는 감각과 용인술이 매우 뛰어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